어제 잡은 자리가 생각만큼 좋은 자리는 아니었나봐요
밤에 바람을 상당히 많이 맞았답니다.
비까지 내렸었는데, 바람때문에 그런지 소리는 되게 컸는데
생각만큼 텐트가 많이 젖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오늘은 엄청 일찍 일어난 날이었어요
보통은 몸이 추워서 해가 나오고 난 다음에 일어나곤 하는데
빨리 숙소에 가고 싶다는 마음에 금방 일어났네요
어젯밤에 잠자리를 편 풀숲인데
밖에서 보면 잘 가려진 명당이에요
근처는 로드트레인 주차장이라서
밤에 한두대가 왔다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 안에 누군가 자고 있을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겠죠?
밤에 비가 좀 내려서 그런지
어제 자전거에 많이 묻었던 흙이 조금 씻긴 것 같아요
비에, 진흙에, 서리에... 자전거가 고생이 많지만
집에 지쳐서 돌아가면 자전거를 청소해줄 의지가 사라질 것 같아요..!
어젯밤에 잘 자리를 찾느라 얼떨결에 거리를 좀 좁혀놓아서
오늘은 70km정도만 가면 숙소에 도착해서 여유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날씨는 더이상 도와주지 않네요
구름도 우중충하게 껴있고, 바람도 이제 순풍이 아니에요
약한 역풍이 조금씩 불었습니다.
지난 몇일간은, 10km는 잠깐 다른생각 하고 있으면 지나가는 거리였는데
이제는 10km도 한참을 지나서야 달리는 거리가 되었어요
원래 이런게 정상인데, 한동안 순풍이 불어주니 어느샌가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남호주의 도로는 서호주와는 다르게
갓길의 폭이 정말 좁고(거의 없고), 대신에 도로 좌우에
자갈을 덮어서 포장해놓았어요
비오고, 차가 몇번 밟으면 다 엉망이 되지 않을까 생각읗 했는데
도로 측면의 자갈을 정비하는 차량이 따로 있었네요
중장비를 운전하시는 아저씨와 인사를 나누었어요
여행을 다니면서 정식으로 추월한 유일한 차량일거에요
저렇게 정기적으로 도로 옆 자갈을 정리하는 차량을 굴리느니
그냥 갓길을 넓게 포장해주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호주는 갓길이 빵빵해서 자전거 타기도 편했지만
남호주는 갓길이 좁아서 뒤에서 오는 차량이 더 위협적이고
노변으로 나갈때마다 자갈에 미끄러지는 일이 비일비재해서
남호주의 도로는 별로 안좋아했어요
타이어에 문제가 생긴건지
아니면 트렁크에 쟁여놓은 까까라도 찾고 있는지
차를 세워놓고 트렁크를 뒤지는 아저씨도 있어요
혹시 고장인가... 도와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생각해보니 널라버에서 제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저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넓은 오프로드 트랙이에요
보통은 해안가로 가는 남쪽 도로인데
이 트랙은 북으로 올라가는데다가
별도의 도로명까지 있더라구요
구글 지도를 보니 북쪽 저 멀리까지 펼쳐지는 도로인데
만약 제가 차를 타고 있었다면 과감히 들어갔을 것 같아요
여행이 끝나가고 있으니, 언젠간 사륜구동 차량을 몰고
도로 밖으로 여행을 다녀도 재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뭔가 강한 모험의 냄새가 났었는데.. 아쉽지만
제가 탄건 고작 자전거이기 때문에, 이런 오프로드 트랙은
아직은 무리에요. 다시 포장도로로 돌아왔습니다.
어젯밤에 또 비가와서 그런지
여기저기 꽃이 많이 피었어요
풍경이 제주도 유채꽃밭의 작은 버전 같았어요
길가에 아기천사와 강아지의 석상이 있어서 가던 길을 멈췄습니다.
널라버에 있을만한 조합이 아닌지라
강한 호기심이 들었어요
가운데에 있는 돌덩이에 무언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전에 세상을 떠난 누군가의 비석이에요
BMX 챔피언이신 어떤 아저씨가, 어린 조카를 기리며
이런 오지에 비석을 두셨나봐요. 무슨 이유일까요
이 곳에서 사고라도 당한 걸까요
왜 부모님도 아닌 삼촌이, 이곳에 이걸 놓았을까요
이제 또 널라버에서 몇 안되는 유명한 지점에 왔어요
테디베어 나무입니다.
좀 거대하고 많은 테디베어들이 걸려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만큼 많지도, 크지도 않았어요
무엇보다 좀 낡고 공포영화에 나올 것 같은 인형들이라
밤에 지나갔으면 무서웠을 것 같습니다.
파이리씨 혼자 위풍당당한 자태를 뽐내내요
두고 갈까...? 생각이 안들었던 건 아니지만
두고 못가겟더라구요. 사실 테디베어나무가 있는 줄 알았으면
뭐라도 가져왔을텐데
테디베어나무가 있는건 여행을 다니던 중에 알았습니다.
이곳을 낮에 보게 된 것이 천만 다행이라 생각하며
다시 길을 나섰어요
널라버 로드하우스에 드디어 거의 도착했습니다.
전날 야영을 하고 들어오는지라 감회가 색다르네요
물도 채우고, 휴지도 좀 챙기고, 밥도 먹고, 샤워도 하고
온갖 꿈에 부풀었어요
졸음 운전하면 죽어요..^^ 라는 섬뜩한 경고문구가...
멀리서 로드하우스가 보입니다.
야영을 하고 나서 맞이하는 로드하우스는 언제나
너무 사랑스러워요
로드하우스 근처에는 작은 제단? 같은게 있었어요
가까이서 보니 기념비에요
전혀 기념비같이 안생겼지만...
이 지역에서 물을 찾기 위해 우물을 판 어떤 아저씨를 기리며
이전의 우물 터에 기념비를 세워놓은겁니다.
비석 바로 뒤의 우물 터에요
누가 이런곳에서 물을 찾을 생각을 했을까요
우물을 다 파셨더라도, 이 곳의 물은 전부 짠 물이라
엄청나게 허망했을거에요
널라버 로드하우스 바로 앞에는
제가 오기 50년도 전에 헬멧을 쓰고 널라버를 처음 건너신
대-선배의 자전거가 있었어요
온갖 장비를 싸매고 다니고 있는 저에 비해서는 한참 대단하신 분인 것 같아요
오렌지주스를 한잔 사먹고, 방을 잡으려고 했는데
이전에 여행기를 쓰신 다른 분들이 사용했다던 Budget Room을
더이상을 운영을 안한다고 합니다.
다른 숙소의 가격은 널라버에서 들은 액수중 최고액인
140달러, 거의 12만원에 육박하는 금액이에요
코클비디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창렬가...
밖에서 자는게 너무너무너무 싫고, 물도 보급해야 하고
휴지도 다 떨어져가고, 배도 고프고
핸드폰도 충전하고 싶었지만, 140달러는 너무 비쌉니다.
그냥 다음 숙소까지 거리나 좁히자는 생각으로
2달러짜리 샤워를 마치고,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널라버 로드하우스 근처에는 여행의 마지막 관광지
Head Of Bight 고래 전망대가 있어요
매년 겨울에, 고래들이 남극에서 올라와서 자녀들을 먹이고
새끼들이 크면 그때 바다를 떠나는데
이곳이 고래들의 어린이집 같은 곳이라고 합니다.
이곳에 이것저것 시설이라던지, 화장실이 있는 것 같아서
여기서 자고 가기로 했어요
해가 다 져가고 있어요 어디선가는 자야 하는데
주변은 허허 벌판인지라 정말 텐트를 칠 곳이 아무데도 없어요
이곳은 널라버 중에서도 정말 지역의 의미인
"나무가 없는 곳" 의 의미에 충실한 곳이라
나무가 아예 없어요.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티켓 판매소 옆이라던지, 텐트를 치고 잘 수 있지 않을까
허망한 기대를 하고 더 들어갔어요
아침 8시에 열고, 저녁 5시에 닫는다는... 불길한 표지판
혹시 사람들이 쫓아내지는 않을까, 조마조마 했습니다.
노숙자의 심정이었어요
아니 노숙자가 맞네요 생각해보니
공원 게이트는 닫혀 있었지만, 그래도 저런 헛간같은 건물도 있고
여기저기 캠핑카들이 모여 있었어요
오늘 그래도 여기서 잘 수는 있겠구나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건물안에 들어가 보니, 아무것도 없이 크고 텅 빈 방이 있습니다.
이전에 말 등을 키우는 헛간으로 쓰는 곳이었나봐요
오늘은 이곳에서 자기로 했습니다.
지금은 고래 시즌이라 고래를 많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입장료도 어느정도 들지만, 괜찮은 편이고
이동하는 거리가 좀 걱정이에요, 왕복 20km 정도라서
꼬박 여기를 갔다오는데만 한두시간을 쓸 것 같았습니다.
이곳에는 고래와는 관련이 없는 안내문이 하나 있습니다.
근처의 원주민 거주지에 대한 안내문인데요
이곳에서부터 북쪽으로 몇백키로미터를 올라가면
애보리진 사람들이 살고있던 지역이 있다고 해요
그런데 1950년대부터 영국의 핵무기와 장거리 로켓 실험때문에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 강제 퇴거 당하면서
원주민 공동체도 위기를 맞고, 땅도 오염되었다고 해요
이후 방사능 제거도 제대로 되지 않고
피폭 보상도 미비한 등, 아직 다양한 문제가 얽혀있다고 하네요
아무리 황무지라고 하더라도, 애보리진 사람들에게는
본인들의 문화, 공동체와 강하게 결속되어 있는 장소인데...
헛간 안에 텐트를 처놓고 짐을 정리하고 있으니,
어떤 아주머니 두 분께서 들어오시더니
신기한지 저와 헛간을 구경하시면서 이것저것 물어보시네요
어디서 왔느냐, 얼마나 남았냐, 밥은 먹었냐 등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곧 저녁을 먹을건데, 같이 수프를 먹지 않겠냐고 초대를 해주셨어요!
수프라고 해서 옥수수나 양송이스프 같은걸 기대했는데
우리나라의 소고기 국 같은걸 해 주시더라구요
예상치 못하게 저녁에 푸짐하게 고기라니...
그리고 저녁을 먹고 나서는 아주머니들과
보드게임을 했습니다 ㅋㅋㅋ 정말로 상상도 못했어요
숙소가 비싸서 어거지로 나와 노숙을 하는데
좋은 헛간에, 저녁도 얻어먹고 보드게임을 하고 있다니
심지어 고래를 보는 곳 까지는 거리가 좀 멀어서 걱정되었는데
거기까지는 차로 태워주신다고 하시네요..!
너무 신세를 많이 진 분들이에요
그에 반해 저는 정말 드릴 게 없어서
내가 드릴만한 특별한 건 없을까.. 생각을 하다가
한국에서 가져온 밥이랑 가루가 5종류가 남아있었어요
호주에서는 접해보기 힘들 것 같아서, 나중에 심심할때 한번
드셔보시라고 드렸는데.. ㅠ 정말 감사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이렇게 좋은 일이 있으니
여행 막바지에 정말 뿌듯하고 좋았어요
이때 쯤 헬멧에 있던 카메라의 저장공간이 바닥나서
더이상 동영상은 찍지 못했습니다. 사진도 좀 부족하네요 ㅠ
다음 여행기도 곧 찾아뵐게요!
이제 275km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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